
서해의 여러 섬을 포함하고 있는 인천은 1062제곱킬로미터로 대한민국 면적 8위다. 하지만 북서쪽 백령도에서 남쪽 덕적군도에 이르는 넓은 해역이 모두 인천이므로, 도시의 끝에서 끝으로 따지자면 단연 제1위의 대도시라고 할 수 있다. 인구는 290만 명 정도로 서울, 부산에 이어 3위다. 이 도시는 오랫동안 서해에서 한강으로 들어가는 관문이기에 한반도 역사의 주 무대가 되는 일이 많았다.
고려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인천은 항구도시로서 각광을 받기 시작한다. 그때까지 중국과의 교류는 황해도의 옹진과 산둥반도 사이의 해로에 의존했다. 하지만 1073년(고려 문종 27년)에 발해만을 장악한 거란을 피해 더 남쪽으로 교역로를 바꿨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저장성, 고려에서는 인천 앞바다의 자연도(현 영종도)를 종점으로 한반도 서해를 두루 오가는 해로가 열렸다. 더불어 자연도에 도착한 중국인들을 맞이하기 위해 경원정(慶原亭)이 들어섰다. 중국의 사신이나 무역상들은 이곳에서 험한 뱃길의 고생을 잊으며 놀고 쉬다가 내륙으로 향했다.
대접하는 식품은 10여 종인데 국수가 먼저이고 해물은 각양각색에 아주 진기했다.
금그릇과 은그릇에 음식이 담겨 나오고, 청자 그릇도 보였다. 쟁반과 소반은 칠기였다.
-『고려도경』
1123년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에 도착해 대접받은 서긍이 『고려도경』에서 소개한 당시의 상차림이다. 고려의 경제력과 문화 수준이 아주 높았음을 엿볼 수 있다.
경원정(慶原亭) 덕에 인천은 경원군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후에 경원부(慶源府)로 이어졌다. 교역의 요지가 된 이래 인구가 지속적으로 늘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조선이 개국하고 나서는 고려 때 잠깐 쓰였던 인주(仁州)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태종 때는 아예 군으로까지 내려갔는데, 1413년에 비로소 인천군(仁川郡)이 되어 인천이라는 이름이 이어졌다. 상업과 교역을 억제하려던 조선왕조의 정책이 경원정과 인천항의 흥청거림에 찬물을 끼얹은 것일까? 인천은 강화도와 함께 교역뿐만 아니라 국방의 차원에서도 오랜 역사적 의미를 가졌다. 일찍이 660년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의 13만 대군이 황해를 건너 상륙한 곳이 바로 인천 앞바다의 덕물도였다. 그들은 신라와 힘을 합쳐 백제를 멸망시켰다.
피와 눈물의 역사를 간직한 인천은 20세기 중후반 이후부터 국방보다는 경제 및 교통의 요지로 더욱 부각되고 있다. 특히 이제는 바닷길뿐만 아니라 하늘길에서도 대한민국의 관문 역할을 한다. 1992년부터 영종도와 용유도 사이의 바다를 간척해 확보된 땅 위로 공항 건물이 들어섰다. 그리하여 2001년 3월 29일 개장한 인천국제공항에는 하루 24시간 동안 평균 1100대의 비행기가 오르내리고, 20만 명의 승객들이 드나든다. 일제강점기부터 항만 시설을 현대화해 1974년에는 인천항 전체가 갑문 시설을 구비했다. 인천항은 연간 972만 톤의 해운 물동량을 소화하고 있다. 육로로는 1899년에 한국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개통되었으며 지금은 그 구간을 확장해 서울지하철 1호선이 달리고 있다.
1967년에 착공해 1968년에 개통한 경인고속도로도 한국 최초의 고속도로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통신에서도 1898년 서울 경운궁과 인천 사이에 한국 최초의 전화선이 가설되었다. 전화선이 놓인 지 사흘 만에 고종이 수화기를 들고 인천의 감옥에서 일본인 살해죄로 사형 집행을 기다리던 백범 김구를 사면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인천에 최초로 들어선 것들은 또 있다. 강화도 마니산의 참성단은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쌓은 것으로 한국 최초의 종교 시설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 남아 있는 참성단은 조선 시대에 중수된 것이다. (고려 건국 이전부터 이 참성단에서 제사를 지낸 기록이 있으니 최소 천 년이 넘은 종교 시설이다) 지금도 개천절 행사와 전국 체전 성화 채화에 사용되고 있다. 강화도의 삼랑성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이 있다. 이 전설대로라면 남한에서는 최초로 쌓은 성인 셈이다. 물론 그렇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삼국 시대에는 지어진 듯하고 이후 고려와 조선에서 정족산성을 덧붙이고 더욱 확대하여 임시 궁궐과 왕조실록을 보관하는 곳으로 만들었다. 또한 이곳은 병인양요의 격전지이기도 했으니 서양인의 피가 최초로 뿌려진 한국 땅이기도 하다.
훨씬 많은 피가 뿌려진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하는 자유공원은 1988년에 조성된 한국 최초의 근대식 공원이다. 당시의 이름 ‘각국공원’이었는데, 강화도 조약 이후 들어온 서양 각국 사람들의 거류지가 주변에 있었기 때문이다. 자유공원이라는 이름은 1957년 맥아더 동상이 세워지면서 붙여졌다. 또한 이 공원은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 최초의 민주 정부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1919년 4월 23일 24인의 국민대회 대표자들이 이 공원에 모여 한성 임시정부의 수립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천에는 서양의 병사들과 선교사들이 엇갈린 영향을 끼친 명소들이 많다. 중구 내동에는 내동 성공회 성당이 있다. 성공회 성당으로는 한국 최초로 세워진 성당인데(1890년), 인천상륙작전을 전후로 불타버려 지금은 1956년에 중건된 건물로 남아 있다.
그 옆으로 몇십 미터만 가면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인 내리교회가 있다. 1891년에 지어졌는데 1년 뒤에는 한국 최초의 초등학교로 여겨지는 영화학당을 부설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역시 본 건물은 6·25 전쟁 때 많이 파괴되는 바람에 1955년에 허물고 다시 지어 지금은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 있다.
내동에서 벗어나 신포국제시장을 가로질러 가면 1899년에 지어진 답동성당이 있다. 인천광역시 최초로 지어진 가톨릭 건축물로 빼어난 건축미를 자랑하며 여전히 사람들의 발길을 불러 모은다. 이 역시 6·25 전쟁의 상흔을 겪었지만 피해가 그리 크진 않아서 보수공사로 그쳤다.
인천은 섬의 도시이기도 하다. 사람이 사는 섬만 무려 42개에 이른다. 면적을 따져봐도 섬 지역이 인천의 3분의 2에 이른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옹진군과 강화군 등이 인천광역시로 편입됨에 따라 그리되었다. 베네치아를 둘러볼 때 무라노섬 등을 둘러봐야 하듯이 인천을 둘러볼 때 섬들을 빼놓을 수 없다. 소정방이 닿았던 덕물도는 현재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덕적도이며, 서쪽의 굴업도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으로 유명하다. 송나라 사신들을 대접하던 자연도는 지금의 영종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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